3·1운동을 준비한 지 100년, 2월 28일 오전 11시부터 기념행사 및 위령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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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준비한 지 100년, 2월 28일 오전 11시부터 기념행사 및 위령제 개최
  • 이예원 기자
  • 승인 2011.02.1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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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준비100주년기념행사 준비위원회 결성 추진
발기인 72명 참석 세미나 -
 지난 12일(토). 오후 3시. 3·1운동준비100주년기념행사를 위한 추진위원회/준비위원회가 ‘3·1정신의 부생(復生)과 한반도의 통일’(강사 최주완)이라는 주제로 우이동 봉황각 강의실에서 세미나를 통해 3·1운동준비100주년기념행사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를 잃는다고 한다. 3.1운동은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정화이자 이후 민족운동의 점화이다. 누가 언제부터 어디서 어떻게 준비했는지 다들 망각하고 있는 3.1운동, 그 역사를 바로 찾기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3·1 운동하면 떠오르는 것은 유관순 열사다. 그러나 1919년 3월 1일 이화학당의 현재 고등학교 2학년 정도인 유관순 열사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붙잡혔다는 것이 기록의 시작이다. 그렇다고 1918년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서 3·1운동이 무계획적이고 우발적으로 추진되어서 그래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동이라는 인터넷 백과사전에 있는 대로 정의하기엔 너무도 광범위하고 조직적이며 치밀하게 3·1 만세 운동이 이어졌다.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우리 민족이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또 얼마나 이것을 중요하게 알고 이를 근거로 독립만세운동에 목숨을 걸었을까? 일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는 분위기만을 믿고 과연 목숨을 건 만세운동을 그리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벌일 수 있었을까?

 경성에서 시작되어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으며, 일본과 연해주 등 재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하였다. 임종국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60일 동안 1,214회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모든 언론과 정보가 통제되던 그 시절 들불처럼 번진 3.1운동은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만으로도,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 시위 횟수만 1, 542회, 사망자 7,509명…. 엄청난 규모다. 그 감시와 폭압적인 시절에 들불처럼 번진 이 3·1 운동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건 명칭은 조선만세소요사건(朝鮮萬歲騷擾事件)이고, 기본적 시각은 ‘소요’(뭇사람이 들고일어나서 폭행·협박을 함으로써 한 지방의 공공질서(公共秩序)를 어지럽게 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개인적인 평가는 다른 점도 있다. 경기도 경찰부 경찰부장을 지낸 지바(千葉了)는 자신의 글 ‘조선독립운동비화’에서 3·1 운동에 대해 “민족 본능 지하수의 분출” 또는 “천변 괴이의 상” 즉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적어 놓았다.

 기미년에 들불처럼 번진 3·1 만세운동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독립을 향한 마음이 서로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만주지방에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3·1 운동으로 말미암아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세계적으로 독립의 결의를 나타내 각 국가의 국민에게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파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은 이런 한국의 뜻을 받아들여 대한민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3·1 운동이 바로 우리나라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점화인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셈이다. 그 천변 괴이의 상,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과연 모두 우연하게 이루어졌을까? 모든 언론과 정보가 통제되던 일제 강점기 그 시절, 엄청난 감시와 폭압 속에서 독립선언서들과 태극기를 인쇄했던 그 인쇄기들은 어디서 났을까? 누가 그 준비 비용을 댔을까? 또 누가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그것들을 인쇄하고 몰래 감춰 민중에게 전했을까? 무지몽매했던 그 민중들에게 또 누가 대한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었을까?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들도록 그 신념을 심어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렇게 들불처럼 번진 3.1운동의 준비는 누가 어디서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했을까?

 준비 과정에 일어난 신철에 관한 일화가 있다. 1919년 2월 하순 인쇄소 보성사(普成社)를 급습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申哲: 일명 申勝熙)은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보는 앞에서 윤전기를 멈추고 ‘독립선언서’를 빼내어 보았다. 이종일이 최린에게 보고하자 최린이 신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돈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과연 우발적으로 무계획적으로 일어났을까? 아니면…. 계획적이었을까? 누가 돈을 얼마나 주었을까…. 신철은 당시 친일파 이완용이 받은 만큼, 당시 5천 원 지금 화폐가치로 2억 원 이상을 받고 도망을 갔다고 한다. 과연 최린이 그렇게 결정했을까?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한 시대가 아닌 그 당시, 일본 강점기에 전국적으로 인쇄소는 얼마나 있었을 것이며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인쇄할 곳은 과연 몇 곳이나 되었을까? 그 많은 것들을 어디서 어떻게 인쇄되어 전국으로 어떤 방법으로 일거에 퍼지고 어떻게 조직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 많은 자금을 모았을까? 과연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3·1운동의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상해 임시정부와 한성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하는 헌법 전문에 밝혀진 것처럼 대한민국 건국의 근간이 되고 있는 3·1운동이 무계획적이고 우발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대한민국 건국 또한 그 정통성에 흠이 될 것이다. 진정 우리 민족정신의 발현으로 준비된 것인데 그것을 지금 우리가 몰라 준다면 그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나와 있는 3·1운동의 정신을 만든 분들은 얼마나 억울할까? 아닌가?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준비되었다고 간략하게 쓰여 있다.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천도교인, 기독교인, 불교도인이 모두 함께 대표로 참여하였다.

 죽음을 각오하여 달려들도록 그 신념을 심어준 사람이 있었다.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선생께서 1911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우이동에 조선 건국의 왕기가 서렸다는 삼각산 아래 27,900여 평을 무조건 사들이게 했다. 보국안민(報國安民)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각 지역의 지도자를 키우기 시작했다. 건물 이름은 봉황각, 거기 ‘3·1 만세운동의 시원지’라고 작은 간판이 서 있다. 100년 전 그곳에서 치밀하고 오랫동안 3·1운동은 준비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동안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왜일까?

 사람의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그 큰일, 목숨을 다 걸어야 하는 그 큰일을 준비하게 한 사람들이 있는데 대한민국 건국의 그 근간 정신을 세운 사람이 준비했던 그 일은 기억하면서 그 준비한 것은 잊고 있었다. 이를 찾아 그 정성을 위로하고 기념하기 위해 3·1운동준비100주년기념행사 추진위원회는 오는 2월 28일 오전 11시부터 3월 1일 위령제와 만세재현, 기념식까지 작지만 뜻깊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100년 전 그 준비를 한 곳에서…. 한반도통일을 꿈꾸며 나아가 세계인을 선도하는 위대한 우리 한민족 선도시대를 열기 위해 의암 손병희 선생과 애국선열을 위한 추모 위령제를 지내며 다시 세계인의 3·1운동을 시작한다.

 100년을 기다려온 사람, 우이동 봉황각에 3·1운동을 준비한 사람이 오는 2월 28일 대한민국 역사를 생각해줄 후손들을 기다리고 있다.

 준비위원회 대표 오의교 3.1정신선양회 회장 등 77명 참석(실무 준비 간사단, 김관희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김현풍 삼각산 애국지사묘역 성역화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회장, 정우일 민족정신수호협의회 공동대표, 조성제 무천문화연구소 소장, 전희규 한국유비쿼터스학회 이사, 윤영용 소설가, 노진화 서울지역언론대학원연합(AMPM)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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