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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사람들 김동길의 인물 에세이 -55회- 방우영
2019년 01월 05일 (토) 06:26:06 김동길 sunsta@sunnews.co.kr

 방우영은 해방이 되고 1946년 같은 대학에 같은 해 입학하여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와는 매우 가까운 친구였다.

  그가 캠퍼스에서 유명한 학생으로 부각된 것은 까닭이 있다. 6·25가 터질 때까지 남조선의 모든 학원에서는 좌·우익 학생들의 대립과 충돌이 빈번하였다. 그는 우익 학생들의 선봉장이었고 박갑득, 홍영철, 정태성등 힘깨나 쓰는 학생들이 모두 그를 따르고 그와 함께 각종 ‘전투’에 참여했는데 방우영 자신이 완력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잘 사 주는 방우영은 의협심 있는 사나이였다. 38선 이북에서 김일성의 포악한 정치가 차차 들어나는 것을 보고 월남하여 대학에 입학했던 우리들은 그와 의기투합하였다. 그의 가정환경이나 배경은 전혀 몰랐고 그가 계초 방응모의 손자라는 사실은 졸업한 뒤에야 비로소 알았다. 그는 그런 자랑을 우리에게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김동길 선생

 6.25가 터지기 전에 총학생회장(학도대장)에 출마하여 캠퍼스에서 선거 유세를 한답시고 기염을 토하는 나를 향해 “너는 제 명에 죽기가 어렵겠다”라고 한 마디 던진 친구가 바로 방우영이었다. 그 뒤에 우리는 전란 때문에 모두 피난민이 되어 남한 일대를 헤매이었고 중공군의 남침이 9·28 수복을 무색케 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은 3년이나 계속 되었다.

 그 전쟁의 와중에 그는 조선일보의 견습생으로 입사하여 1962년에는 조선일보의 상무가 되었고 방일영이 1970년 사장 자리를 동생 우영에게 물려 준 그 날부터 그는 조선일보를 한국 최고의 신문으로 만들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용전분투하였다.

 내가 미국서 공부를 끝내고 돌아와 편집부의 청탁을 받고 조선일보에 시론을 몇 편 쓴 적은 있지만 조선일보와는 비교적 먼 거리에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나는 타고난 기질이 좀 저항적이고 전투적이기 때문에 조선일보와는 생리적으로 꼭 맞는 필자가 아니었다.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이나 고문이 될 자격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뜻밖의 사건이 하나 언론계에 발생하였다. 그 당시 나는 어느 일간지에 ‘동창을 열고’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가고 전두환이 들어선 그런 시기이었다. 그 신문에 “나의 때는 이미 지났다”라는 제목 하에 그동안 한국정치를 휘어잡고 좌지우지 하던 김씨 세사람에게 “이젠 제발 정계를 떠나 조용히 낚시나 하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라는 내용의 글을 한 편 올렸다.

 짧은 칼럼 하나가 폭탄처럼 터져 나는 하루에 100통 이상의 독자 편지를 받는 유명논객이 되고 만 것이다. 그 편지들은 분류한다면 “속 시원한 이야기이며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라고 하는 독자가 98명이고 2통은 왜 갑자기 그런 글을 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일종의 투정이었다.

 바로 그 시기에 조선일보에서 잔뼈가 굵어진 나의 후배 정광헌이 그 신문사 공무국장이었는데 사장 방우영과는 매우 가까운 사이이어서 사장의 부탁을 받고 나를 찾아와 간청하는 것이었다.” 형님, 이젠 조선일보에 와서 글을 좀 써 주세요. 형님의 친구인 방 사장의 간곡한 부탁입니다“ 그런 인연으로 하여 방우영을 만났고 친구의 간청을 못 이겨 그 신문사의 논설위원실로 자리를 옮겼고 여러해 칼럼을 연재하던 그 신문사에 ‘마지막 칼럼’ 이라는 제목 하에 글 한편을 써서 보냈다.
 그 신문의 장모 기자는 내가 강연 때문에 가있던 캐나다까지 나를 찾아와  칼럼을 중단하지 말아 달라며  ‘마지막 칼럼’은 낼 수 없다고 하여 나는  진퇴양난의  궁지에 몰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긴 것은 나의 매우 잘못된 판단이었다. 논설고문이라는 직함도 여러해 가지고 있었지만 칼럼은 이래저래 두서너편 밖에는 쓰지 못하였다. 그 신문사에 이미 자리를 잡은 평화주의자들이 내 원고를 신문에 싣기가 어렵다고 난색을 표명하니 나는 결국 언론계의 미아나 고아가 된 셈이어서 ‘3김 낚시론’으로 한번 세상을 소란케 했던 그 신문사에 대하여는 한 평생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한 때 방우영과 김동건 사이에서 이야기가 되어 TV 조선 채널 19에 낭만논객이라는 프로그램을 내가 가수 조영남과 함께 시작하기로 하고 2년간 100회를 이어가는 것도 참 힘겨운 일이었다. 도중에 끝내야 하겠다는 말들이 편성부에서 여러 차례 오고 같지만 100회를 간신히 끝내고 물러났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나는 한평생 ‘을’의 자리에 계속 만족하고 살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대한민국 군사재판에서 15년형을 구형 받고도 ”재판장 나는 항소를 포기합니다“라는 한 마디로 바로 그 순간 ‘갑’을 제치고 갑의 자리에 올라 앉아 내가 한참 ‘갑’을 노려보는 의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0년의 사람들’이라고 신문사가 지어준 타이틀 밑에 인물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면서 100명은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나는 앞으로 방우영이 없는 조선일보와는 먼 거리에서 조용히 살겠다.

 한 시대의 언론계의 거목이던 나의 친구 방우영과 여러 해 사장을 도와 그 신문사의 공무국장으로 심혈을 기울여 조선일보가 체제나 내용에 있어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신문으로 탈바꿈 하게 한 후배 정광헌과 8천명이나 되던 그 많은 일꾼들에게 나는 경의를 표한다.

 어떤 잘난 한국인도 올해 92세가 되는 이 늙은이의 자존심을 밟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앞으로 어떤 개인도 어떤 집단도 어떤 정치권력도 신촌에 사는 이 노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는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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