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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사람들,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이준묵
2019년 06월 01일 (토) 17:02:38 김동길 sunsta@sunnews.co.kr

 내가 90 평생에 만난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평범했기 때문에 가장 위대하다고 느껴진 인물이 꼭 한 사람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삶이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그가 섬기던 장로교회의 총회장과 신학 대학의 이사장 자리를 오래 지킨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삶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는 한평생을 전라남도 해남이라는 매우 작은 시골의 도시에서 줄곧 한 교회만을 섬기며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또는 전 국민 사이에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가 살아있던 그 세월에는 해남에 사는 사람치고 정치인이건 장사꾼이건 불교신자이건 기독교신자이건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해남교회의 이준목을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45년 그 교회에 부임한 이후 그 교회만을 섬기며 한 평생을 살았고 아들, 딸을 잘 키워 좋은 대학을 졸업하게 하였고 해남에서는 이준묵에게 잘못 보이면 절대 국회의원이 될 수 없다는 말도 있었다.
 목사 이준묵이 “김모 후보는 참 좋은 사람이지요”라고 한 마디 하면 그 후보는 어김없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었으니 어떤 지역엔들 이준묵만큼 유력한 인사가 있었겠는가!

   
▲ 김동길 선생

 그에게는 훌륭한 형님이 한 분 있었다. 그는 뒤에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하여 호남비료와 아세아 자동차를 일으킨 재개의 거물, 이문환이었다. 그 두 형제가 태어난 집은 가난하기 짝이 없어서 상급학교에 진학을 할래야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중학교를 마친 이준묵은 신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집안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 진학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형 이문환이 동생에게 말했다. “너도 나도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함께 상급학교에 갈 수 있겠느냐. 나는 이제부터 일본에 가서 공장에서 일을 하며 기술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 너의 학비는 내가 다 댈 터이니 너는 안심하고 공부만 해라”

 그 형이 있었기에 동생 이준묵은 신학교로 마칠 수 있었고 해방되던 그해 정월에 해남읍 교회에 파송된 것이었으나 교회라고 해야 초가지붕에 초라한 건물이었고 교인도 십여 명 밖에 되지 않아 열악하기 짝이 없는 형편이었다.
 이준묵은 그 하나님을 믿고 그 형을 의지하며 힘겨운 목회 생활을 시작하여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그 한 교회만을 섬길 수 있었다.

 그가 설립한 고아원 ‘등대원’에서 생활했던 한신대 오영석 교수는 어려서 먹을 것도 없고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가 그의 답답한 심정을 ‘하나님 전 상서’라는 편지 한 장으로 엮어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밝힐 수는 있었지만 수취인의 주소는 몰라 하나님이라고만 써서 우표를 붙이지도 못하고 우체통에 넣었다.
 이 편지를 수거해 간 우체국에서는 우표도 부치지 않은 편지를 주소도 모르는 하나님께 전달할 수가 없어서 해남의 해결사 이준묵 목사에게 전하면서 좀 읽어 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소년의 그 편지는 하도 간절하여 하나님 대신 그 편지를 받아 본 이준묵목사는 부인을 보내서 그 소년을 데려오고 그가 외국에 유학을 하기까지 모든 생활을 돌보아 주었다는 ‘하나님 전 상서’라는 일화가 있다

 내가 그 교회 초빙되어 여러 날 집회를 가지게 된 그때는 교회의 건물도 훌륭했고 목사 사택도 운치있게 지어진 한옥이어서 그때 받은 첫 인상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첫 날 저녁 모임을 시작할 때 교회당을 꽉 메운 청중들에게 연세대학의 교무처장 자리에도 올랐고 차차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그런 무명 교수의 지나지 않은 나를 소개하기를 “김동길 교수는 연세대 교수 일뿐 아니라 장차 민족의 지도자가 될 인물입니다”라고 하여 나는 한참 어리둥절 했었다.
 나는 오늘 나이 90이 넘어 유튜브를 통해 가히 전국적인 인물이 되어 이준묵의 그 예언을 가끔 생각하게 된다. 해남 교회의 사택에 여러 날 머물면서 그의 안내를 받아 땅 끝이라고 소문난 그 곳을 찾아가 보았고 장시간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은 기회를 가졌다.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전해 주었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내 형님의 덕분입니다. 시골 목사가 어떻게 그 학비를 다 댈 수가 있었겠습니까. 서울에 내 이름으로 조그만 아파트도 하나 있는데 그것도 내 형님이 사 주신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는 것 같았다. “형님은 내 아들, 딸이나 자기 아들, 딸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학비도 주고 용돈도 주었습니다.”라고 덧붙이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 딸이 다 잘 되었고 이광희는 서울에서 유명한 디자이너로 지금도 활약하고 있다.   그 형 이문환의 딸은 최근에 방송협회 회장으로 선출된 차인태의 부인 이선희이기도하다.
 해남 등대원은 이준묵이 시작한 고아원이고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그의 아들이 회사에 간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 일을 계승해 열심히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들의 어머니 이수덕은 남편과 다름없이 가난한 이웃의 벗이 되어 살고 간 성녀라고 할 만큼 훌륭한 어머니였다. 선량한 부모의 아들, 딸이 다 잘 된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물론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겠지만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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