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스승과 재학시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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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스승과 재학시절 이야기
  • 류남주 기자
  • 승인 2009.08.13 22:0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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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륜과의 만남 -
 (편집자 주) 다음 수필은 본사 발행인/ 대표인 이일성의 중.고 모교인 대구의 대륜학교 교우지인 '샛별문화' 31호에서 발췌한 것으로 이글을 읽음으로서 지난 시절의 시대상도 엿볼수 있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대륜과의 만남
           - 잊지 못할 스승과 재학시절 이야기 -
                                                                   이 일 성 제43회(중37. 고19회)

 ‘봄바람 가을비 몇 해였든가 알뜰히도 쌓아온 공든 저 탑이...’ 새삼 졸업가가 떠오른다. 내가 모교와 만나서 헤어진지도 어언37년이란 세월이 되었고, 또 그동안 잊지 못할 은사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나는 아직도 대륜학생인양 정신적으로 늘 만나고 있는 것은 나의 집착과 연약한 마음 때문만은 아니니라.
 그해 겨울은 혹독하게 춥지는 않았으나, 매년 유별나게 거듭되는 입시일의 추위로 손을 호호 불며, 어린 시절 큰누님께서 시집와서 사는 대구방문 이래 세 번째로 대구를 오는 촌놈으로, 초등학교 동기인 돌아가신 박동하 선생님의 처남과 함께 선생님의 댁에 들러 아침을 먹고 전쟁이 끝난 폐허와 같이 남아 있는 5관구 철수한 자리를 지나서 지금은 신세계아파트 자리인 대륜과 처음으로 만났다. 

▲ ▲ 제주도 수학여행(삼성혈). 좌로부터 필자.2학년때 담임 곽영환선생님.관광안내양.3학년때 담임 김규성선생님.앉으신 분이 당시교감(후일교장) 최유련선생님
 시골 학교라고는 하나 당시 52년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의 자인초등학교에서 6년 줄곧 수석과 어린이 회장으로 졸업하여 자만에 차 있던 내가 K중학교를 수년 만에 처음으로 혼자 지원하여, 합격하리란 선생님들의 기대와는 달리 보기 좋게 떨어지고, 친구 또한 그 당시 두 번째의 실력학교라는 K부속중학교에 지원하여 떨어진 뒤라 우리는 다소 의기소침 했으나 장학생을 목표로 하는데 실패야 있겠느냐하며 서로를 위로하며 교정에 들어섰다.

 배정된 교실로 향하기 바빴으나 그때도 수성교정에서의 추억은 유난히 큰 나무들과 붉은 벽돌의 본관 건물 및 서구적인 유도장이 퍽 인상 깊었다. 이렇게 하여 친구와 나는 무난히 대륜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우리는 교통도 편리하고 또 나이에 따른 엄하신 아버님의 염려 등으로 자인-대구 간을 통학하게 되었다.

 잊을 수 없는 만남. 나는 1학년 담임으로 고 진한규 선생님을 만났다. 목소리도 우렁차시고, 좋아하는 한문과목을 강의하시기 때문에 자연히 흠모하게 되었으나 더욱 선생님을 따르게 된 데는 아버님과의 교분이 시작되고 부터이다. 가정방문 때 시골 우리 집을 찾아오신 선생님께서는 한학과 일본어에 능통하시고, 엄하시나 자상하시기도하며, 민족주의자이신 아버님을 만나서 두 분께서는 서로 예의를 갖춘 뒤, 곧 술좌석을 가져섰는데, 이때 어머님과 나는 방 밖에서 사뭇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평생 처음으로 만나는 두 분께서는 마치 십년지기나 되는 듯이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저녁이 되는 줄도 모르시고 술잔을 주고 받으셨다. 

▲  제3회 경북학생정진대회(각학교 대표) 좌로부터 뒤. 사대부고 김용학(전 한국토지공사 택지본부장). 경북고등 조정환(전 경대교수). 필자. 앞. 대구고등 장성태(전 국민카드이사). 대구공고 김경하

 이때 곤란을 당한 것은 어머님이셨다. 당시 급작히 가세도 기울어진 터에다가 가정방문 오셨으니, 수 시간 후에는 선생님이 돌아가시리라고 예상하시고 5일장 서는 시골이라 변변한 저녁상을 준비하시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지방에서 신사임당이라 불리는 예의에 밝은 어머님께서는 주저하시다말고 나에게 저녁상을 여쭙게 하셨고, 두 분께서는 합의(?)를 시원히 봐서 어머님이 준비하신 쇠고기 국 대신에 집에 있던 ‘범벅’으로 저녁을 드신 연후엔 이내 곧 음주하셔 그 밤을 온통 한시 화답과 인생얘기로 꽃피우셨고, 선생님께서도 부득이 막차를 놓쳐서 이튿날 가신 것으로 추억된다.

 그 이후 두 분께서는 가끔 나를 통한 인편으로 서신 안부를 물었으며, 지금도 생존하고 계시는 어머님께서는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시면 웃으시며, 그때 저녁준비가 시원치 않았던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한문 시간이 되면 한문 한자 익히는 것도 재미있었으나 중용․ 명심보감 등의 말씀과 교훈이 좋아서 열심히 공부하였고, 진 선생님 또한 이러한 나를 귀여워하셔 어떤 때는 내가 급우들에게 설명하게도 하시는 등 무척 사랑해주셨다.

 대륜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학생간부로 선생님을 교무실에서 자주 뵈었는데, 공교롭게도 아버님과 진 선생님께서는 아버님께서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돌아가셔 6년여의 두 분의 교분은 편지왕래로만 끝난 것으로 기억되고 선생님 또한 수년 뒤 타계하시니 인생무상을 느끼며, 나의 대륜중학교의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이 되고 있다. 

 

▲  제주수학여행 용두암 앞바다.왼쪽 필자(학생 대표).서영종 현 기아자동차 사장(학생 대대장)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남달리 민족사학이란 자부심과 긍지를 지닌 나는 다시금 모교인 대륜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고 최유련 교장선생님은 중학교 때도 가끔 뵈었으나 그냥 깡마르시고 깐깐하시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회간부 활동을 하면서 수업시간 정보 등으로 선생님을 자주 접촉하게 되면서 은연중 교육자적인 참모습의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었고, 특히나 학과목의 시간이 결강되면 당시 교감으로서 보강을 들어오시는 데, 얼마나 나에게 많은 교훈과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는지!...,

 삼라만상의 자연법칙과 철학, 충. 효와 인륜, 대륜정신 거기에다 인간모습의 얼굴형들과 대체적인 성격 등등 선생님의 강의는 당시 입시위주로 진행된 어느 시간보다도 파격적이었으며 흥미 있었고 진지하게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사제지간의 사랑이 위기에 다다랐으니.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인 나는 박종홍 교수의 ‘현실과 구상’, ‘한국의 사상적 방향’ 이란 철학서를 탐독하였는데, 학생 신분으로서는 인정받기 어려운 3선 개헌반대 데모를 주동하여 학교를 온통 술렁이게 만들었다. 연일 계속되는 소요로 드디어 최교장 선생님께서는 지금 그 자리를 지적하라 해도 기억할 만큼 설송(공교롭게도 선생님의 아호) 아랠 거니면서 “자네가 끝까지 데모를 지시 강행한다지. 자네는 내 제자가 아니야” 하는 당시 나로서는 산이 무너지는 듯한 통고를 받았다.

 지금도 기억되지만 당시 선생님께서는 학교 및 학생들에 대한 행정 책임자로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윗선의 지시와 교직자적 양심으로 무척 고뇌하셨으며, 세월이 흐른 지금 나 또한 그 자체(데모)에 대한 시시비비를 떠나서 혹 그 때문에 수업과 느낌의 영향으로 생(生)의 나아가는 방향에 나쁜 영향을 동문들에게 미친 것은 없는지. 그 점만은 깊이 뉘우친다. 

▲  현충사기공식(아산)에 대구고등 학생대표와 함께

 여하튼 나는 같이 합의 데모한 T고교 학생대표와는 달리 선생님들의 노력과 내가 작성한 선언문이 합리적 진취적이고 온건하며 고등학생 수준으로서 명선언문이란? 중론으로 구제되어 무사히 졸업하였고, 그 이후 간곡한 나의 편지와 뜻으로 최교장 선생님과 나는 따뜻한 사제지간의 정으로 다시금 만나, 군대시절 편지를 드리면 꼭 친필로 답해 주셨고, 이른 나의 결혼식에서도 주례를 서시게 되어 영원한 만남을 이루었다.

 돌부리에 채여도 인연이란 불교의 말을 깊이 새기며,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 또는 기쁨이나 슬픔의 만남, 사물과의 만남 등등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이 있지만 이러한 나의 스승과 모교의 만남은 소중하고 영원한 것이다.

 다행히 대륜이란 큰 뜻과 민족사학이란 긍지를 지닌 모교를 졸업이후에도 비록 공간은 달라졌지만 다년간 총동창회 일들로 남달리 대륜의 그 맥이 흘러 이어지는 만촌 교정을 다시금 자주 오르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큰 행복의 만남이었으며, 지금 언론 활동을 사회에 하고 있으면서도 그 영원한 ‘대륜의 만남’의 뜻을 내내 실천할 것을 다짐하고 돌아가신 모든 스승님들의 명복을 빌면서 언제나 대대륜의 정신을 다시금 새기고 지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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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scwa@gmail.com 2015-12-19 23: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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