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을 제압한 배트맨, 전우치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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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을 제압한 배트맨, 전우치는 안된다
  •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 승인 2010.06.27 12: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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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퍼맨과 배트맨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오래된 의문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이 같은 질문에 성실히 답변한 바도 있다. “모든 면에서 슈퍼맨이 유리하지만, 배트맨이 크립토나이트를 동원할 경우는 슈퍼맨이 진다.”

 그러나 지금 하려는 질문은 조금 더 현실적인 것이다. “슈퍼맨 영화와 배트맨 영화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사실 이 싸움이 제대로 이뤄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1950~60년대 영화판은 대부분 B급 프로덕션이어서 도토리 키재기였다. 그러다 블록버스터급으로 ‘슈퍼맨’이 1978년 첫 등장, 1987년까지 3편의 속편을 더 만들어내다 유통기한이 끝나버렸다. 블록버스터급 ‘배트맨’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89년 시작돼 1997년까지 똑같이 3편의 속편을 더 만들어내고 프랜차이즈로서 생명을 끝냈다. 한 마디로 ‘동 시기’에 승부를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운명적인 대결을 벌이게 된 것이 2005년 ‘배트맨 비긴즈’와 2006년 ‘슈퍼맨 리턴즈’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그 승부의 결과는, 사실상 ‘무승부’인 것으로 여겨졌다. ‘배트맨 비긴즈’는 미국 내에서 2억534만3774달러를 벌어들였고, ‘슈퍼맨 리턴즈’는 2억8만1192달러를 벌어들였다. 도긴개긴이다. 해외 수익을 합쳐 봐도 ‘배트맨 비긴즈’ 3억7271만15달러에 ‘슈퍼맨 리턴즈’는 3억9108만1192달러로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제작비는 ‘배트맨 비긴즈’가 약 1억5000만 달러, ‘슈퍼맨 리턴즈’가 약 2억7000만 달러로, ‘배트맨 비긴즈’ 쪽이 더 남기기는 했다. 그러나 일단 수익으로만 본 첫 승부 자체는 1:1이었다.

 그러나 세계 극장흥행이 끝나고 난 뒤, 명암이 갈리기 시작했다. ‘배트맨 비긴즈’ 쪽이 미디어에 의해 더 많이 회자되고, 인터넷 속 영화 마니아층 반응도 남달랐다. DVD 판매가 가히 현상적인 급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다보니 비슷한 수익을 얻었음에도 ‘배트맨 비긴즈’는 속편 제작이 시급히 이뤄진 반면, ‘슈퍼맨 리턴즈’는 아직까지도 뚜렷한 속편 계획이 잡히지 않고 있다. 결국 프랜차이즈화가 되지 못하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영화의 질적 차이라고 보긴 힘들다. 둘 다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다. 미국 비평가들의 호평과 혹평을 분류하는 로튼토마토(www.rottentomatoes.com) 집계에서, ‘슈퍼맨 리턴즈’에는 76%의 비평가들이 호평을 보냈고, ‘배트맨 비긴즈’에는 84%의 비평가들이 호평을 보냈다. 적어도 비평가들 입장에서는 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대중 반응은 달랐다. 네티즌들이 매긴 점수가 드러나는 인터넷무비데이터베이스(www.imdb.com) 레이팅에서 ‘슈퍼맨 리턴즈’는 10점 만점에 6.6점에 그친 반면, ‘배트맨 비긴즈’는 8.3점으로 올라서 역대 영화들 중 107위에 랭크됐다. 결국 ‘배트맨 비긴즈’ 쪽이, 질적 차이와는 관계없이, 현대 대중 ‘취향’에 더 맞는 속성을 지녔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그 ‘취향’의 속성이란 대체 뭘까?

 이 미스터리에 적절한 답을 내려준 것이 ‘슈퍼 히어로, 미국을 말하다’의 저자 마크 웨이드다. 그는 분석 글 ‘슈퍼맨에 관한 진실: 그리고 우리 모두에 관한 진실’에서 “X세대는 현재 자신들이 사는 세상이 이전보다 훨씬 위험하고, 훨씬 불공정하며, 훨씬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있다고 여긴다”며 “그들 눈에 비치는 세상은 무한 팽창하는 자본주의가 항상 승리하고 정치가는 항상 거짓말을 하며, 스포츠 우상은 약물을 복용하고 아내를 두들겨 패며, 하얀 나무 울타리는 그 뒤에 뭔가 어두운 것을 음흉하게 감추는 그런 세상”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극단적인 보수주의자 빅 블루 보이스카우트인 슈퍼맨은 극적으로 나서서 현 상태를 ‘보호한다.’ 그가 더 이상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분석한다.

 정확한 지적이다. 슈퍼맨이 사는 세상은 그런대로 평화롭고 조화로운 세상이다. 일종의 유토피아에 가깝다. 그런데 이 세상 밖 외계에서 악당이 내려와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려 하고, 슈퍼맨은 이를 물리쳐 세상을 ‘예전 그대로’ 보호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배트맨은 다르다. 배트맨이 활동하는 고담시는 악의 소굴과도 같은 곳이다. 디스토피아다. 그 안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범죄, 그 범죄에 대한 시민들의 무관심과 이기주의, 범죄를 소탕할 의무가 있는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부패와 비리, 세상 자체가 비뚤어졌다. 그리고 배트맨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항해 싸운다. 외부와의 전쟁이 아니라 내부의 투쟁이다.

 그러니 “현재 자신들이 사는 세상이 이전보다 훨씬 위험하고, 훨씬 불공정하며, 훨씬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있다고 여”기는, 냉소적인 주 영화소비층의 눈에는 배트맨이야말로 진정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히어로로 비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탓에 전작으로부터 3년 뒤 등장한 속편 ‘다크 나이트’가 3년 새 불어난 공감 층을 결집시켜 전작의 2배가 넘는 5억3334만5358달러를 벌어들이고, 세계에서 전작 3배에 가까운 10억192만1825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슈퍼맨 리턴즈’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지지도를 갖추게 됐다.

 이처럼 복잡하게 끝난 ‘슈퍼맨 영화’와 ‘배트맨 영화’의 대결은 한국 영화산업에도 중요한 조언을 해주고 있다. 한국도 이제 서서히 슈퍼히어로물을 가동시키고 있다. 지난해 ‘전우치’가 그 첫 타자로 등장, 6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바이오맨’ 시절보다는 대중의 동의를 확실히 얻어낸 결과다.

 그러나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이벤트성 기획의 속성에 비춰보자면 다소 실망스런 감도 있다. 슈퍼히어로물은 사실상 한국에서 시도될 수 있는 기획들 중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는 장르다. 재난영화 이상이다. 600만 정도가 아니라 1000만 관객을 노리고 등장해야 할 법한 초대형 승부수다. 또한 프랜차이즈화 시켜 안정적인 발판을 통해 몇 번이고 더 수익을 우려내야 하는 목적을 띠고 있기도 하다. 이를 성공적으로 구현하려면 ‘슈퍼맨 영화 vs. 배트맨 영화’ 구도의 교훈을 정확히 따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주 영화소비층인 20~30대 역시 마크 웨이드가 바라본 미국 젊은 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현 30대는 1990대 중반 X세대라 불렸다. 온 세상이 다 그들 것이 될 것인 양 모든 미디어가 띄워줬지만, 정작 이들이 세상으로 나아가려 할 시기는 IMF 외환위기로 비롯된 경제 불황 상황이었다.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세상의 리더는커녕 자기 앞가림조차 하기 힘든 시절이 이어졌다. 이들 눈에 세상은 분명 불공정하고 불편부당하며 부조리하다. 냉소적 시각으로 그득 차 있다.

 20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불황 속에서 사춘기를 보내고, 세상에 눈을 뜬 시점부터 한 번도 세상은 자신들에 너그러웠던 적이 없다. 역시 냉소적이며, 세상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뒤바꿔’ 주는 것이 바로 슈퍼히어로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결국 이들 주 영화소비층의 시각에서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을 생각해봤을 때, 다음과 같은 설정 상 결론들이 나오게 된다. 먼저 슈퍼히어로의 탄생이다. 슈퍼히어로는 ‘우리들 중 하나’여야 한다. 외계에서 날아온 슈퍼맨이나 과거로부터 타임워프한 전우치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에서 문제의식을 느낀 선각자격 인물로 맞춰져야 인정해준다.

 또한 냉소적인 신세대는 가장 현실적인 세대이기도 하다. 애초 거부였던 브루스 웨인이나 토니 스타크이기에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을 맡을 수 있었다는 점에 동의했다. 같은 ‘부잣집 아들’ 설정이 식상하다면, 정부의 프로젝트라든지 여러 가지 ‘현실적으로 보이는’ 설정이 가능할 것이다. 한국 대중은 본래 정부나 재벌 등 권력 관련 음모론을 유난히 즐기기도 한다.

 끝으로, 한국형 슈퍼히어로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다. 일단 과거 봉인됐다가 2009년 서울에 다시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괴들과 싸운다는 ‘전우치’의 설정은 아웃이다. 강동원의 미모와 화려한 볼거리에 끌린 것이지 대중의 슈퍼히어로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보다 훨씬 살가운 문제들을 해결해줄 필요가 있다.

 범죄율이 다분히 높은 미국 대도시이기에 배트맨은 그들과 싸웠다. 그보다 훨씬 범죄율이 떨어지는 ‘비교적 평화로운’ 한국은? 법망을 피해가는 범죄자, 대중 요구만큼의 대가를 받지 않는 범죄자, 부패한 관료나 정치인 등이 그 타도 대상이 될 수 있다. 거의 자경단원에 가까운 슈퍼히어로 이미지가 한국 대중에 더 어필할 수 있다.

 어찌됐건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수많은 논의 중 단 한 가지 부분에서만큼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슈퍼히어로물만큼 ‘시대분위기’를 타는 장르도 없다는 것이다. 100년이 지나도 별로 달라질 게 없을 재난영화나 멜로영화, 공포영화와는 다르다. 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장르에 접근하려면, 특수효과 기술보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이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주 영화소비층 젊은 층은 어떤 이들인가’라는 고민이다. 200억짜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공허한 히어로보다, 50억짜리라도 정곡을 찔러주는 히어로가 더 먹힐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보면 슈퍼히어로물이야 말로 가장 사회과학적인 장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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