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만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최선이 없다면 차선, 최악만 피하면 희망은 있다
▲ 필자 전원책 변호사 : 1955년 울산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2회(1977년) 백만원고료 한국문학신인상. 전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전 자유경제원 원장 |
이번이 20대 총선이다. 당연히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도 환갑을 훨씬 지난 만큼 성숙 단계에 들어서야 한다. 하지만 여야의 공천과 선거운동 과정을 볼 때, 민주주의의 성숙은커녕 오히려 퇴보해 '패거리(붕당) 정치'가 심화된 느낌이다. 미운 사람 잘라내고, 대권 가도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 쫓아내고, 자기하고 친한 사람 뽑아준 것이 여야의 공천이었다.
이런 자의적 공천은 입법부를 (유권자나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기 마음대로 구성하겠다는 교만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서도 기초연금 대폭 인상 등 포퓰리즘 공약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주요 정당 간 정책과 이념 스펙트럼의 뚜렷한 차이도 없다.
정치에 무관심해지고 냉소적으로 되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정치 냉소증, 혐오증의 폐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유권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택하고, 차선조차 없다면 최악을 버리고 '차악'을 선택하자. 최악만을 피할 수 있으면, 우리는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썬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