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시아의 동남부에 위치한 길리기아(Cilicia) 지방 다소에서 태어난 바울은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살던 집도 아직 거기 있고 그 집 마당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지금도 동네 사람들이 그 물을 길어다 먹습니다.
그는 전통적 유태인으로 좋은 스승 밑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외모는 출중하지 못했으나 매우 유망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유태교의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예수에 관하여 알고 있었고 처음부터 반대하였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이 예루살렘의 공회(산헤드린 - 70인회)에서 재판 받는 과정도 지켜보았다고 하고 사형이 언도되고 사형이 집행되는 과정도 목격하였고 그가 돌에 맞아 죽는 그 현장에도 바울은 있었을 것이고 그는 스데반의 죽음이 당연하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 김동길 선생 |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아주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박해자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어 사울은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는 마흔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니 합하면 백 아흔 다섯 번이나 매를 맞았고 태장으로도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돌에 맞은 것은 한 번 뿐이지만 뒤통수를 맞았으면 즉사했을 것입니다. 그가 탔던 배가 세 번이나 파선을 당했고 물에 빠져서 한 낮과 밤을 물속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전도하기 위하여 여러 번 여행을 다니는 가운데 강에 빠져서 죽을 뻔한 적도 있고 강도들이나 또는 그를 미워하는 유태인들이나 낯선 이방인들을 만나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시냇물도 때로는 광야도 모두 위험했고 잘못된 형제들 때문에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육체적인 고생과 수고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겪은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잠을 자지 못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배고프고 목이 말라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고 춥고 헐벗은 채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갔던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은 사도 바울의 사명은 오직 하나 뿐, 그에게는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그 한 가지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그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고 고상하게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원 67년경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나의 스승 함석헌이 몇 사람 모인 자리에서, “나의 오늘이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기도와 무관하지 않겠지”라고 하셨습니다. 나도 그 말씀 한 마디를 가끔 되새겨 봅니다. ‘여러 번 죽을 뻔한 그 사람’의 뜨거운 기도가 있어서 오늘의 내가 있다고 나도 믿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