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의 숨은 라이벌, 저암 유한준 평전 출간- 고려대 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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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숨은 라이벌, 저암 유한준 평전 출간- 고려대 민연
  • 강희경 디지털부 기자
  • 승인 2021.06.17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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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유한준에 관한 오해와 오명을 씻어내다
저마다의 길(유한준 평전) ∥ 글항아리(5/31) -
'저마다의 길' 유한준 평전 표지측면
'저마다의 길' 유한준 평전 표지측면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동아시아 문명과 한국」 기획팀(팀장 박경남 고려대 교수)은 근대를 이룬 주체로 호명된 ‘상인’과 ‘개인’을 동아시아의 전근대적 시공간에서 탐구함으로써 서구 중심적 근대 담론의 편중된 시각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전근대시기 동아시아의 개인 및 상인을 주제로 지속적인 연구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2017년에는 상인을 주제로 '중국 문학 속 상인 세계', '동아시아 문학 속 상인형상'(소명, 2017)을 출간하여 2018년도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최근 출간된 ‘18세기 개인의 발견 시리즈’는 조선 후기 성리학적 가치 질서와 도문일치론에 균열을 내며 서로 다른 개인들의 의식과 취향, 욕망을 긍정하는 새로운 문학을 추구했던 네 명의 문인들(신유한·조귀명·이용휴·유한준)을 비평적 시각으로 조명한 평전으로 그 중 연암 박지원의 숨은 라이벌이었던 저암 유한준에 대한 평전이 눈길을 끈다.

 18세기에 새로운 사유와 혁신을 보여주는 북학파 문인 박지원이 변화하는 세계를 포착하는 문장을 추구하며 ‘세계로 열린 자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유한준은 각자의 삶을 긍정하는 문학과 타자와의 전면적 소통을 지향하는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과 ‘다른 이’를 과장과 왜곡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서술하는 ‘타자로 열린 자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인 박경남 고려대 교수는 이 평전을 통해 연암의 아들 박종채의 『과정록』에 근거해 형성된 유한준에 대한 오해와 오명이 벗겨지고, 유한준 등 ‘개인’과 ‘개체’에 주목했던 일군의 작가들이 올곧이 조명됨으로써 18세기 사상 및 문학의 또 다른 지향점이 드러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첨부>

유한준에 관한 오해와 오명을 씻어내다.

-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의 내용은 거짓이었다.

 박지원의 둘째 아들인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 근거해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과 유한준은 말년에 원수지간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지원에게 인정받지 못한 유한준이 평소 반감을 품고 『열하일기』를 노호지고虜號之稿(오랑캐의 연호를 사용한 원고)라 비난하고, 만년에 ‘묫자리 분쟁’으로 두 집안이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경남 교수는 유한준 평전인 '저마다의 길'에서 『과정록』의 기록을 주변 기록과 실록 등의 공식적 자료와 치밀하게 비교하여 묫자리 분쟁에 관한 '과정록'의 기록이 허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과정록' 기록 외에 박지원의『연암집』과 유한준의 『자저』 어디에도 서로에 대한 원망이 담긴 글은 찾을 수 없으며, 박지원이 남긴「답창애」라는 아홉편의 짧은 편지에는 젊은 시절 교유를 드러내는 애틋함과 문학적 견해의 차이로 인한 긴장감이 공존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의 일기 '흠영'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연암의 글을 읽고 비평하는 모습 및 '열하일기'에 관한 높은 평가가 담겨져 있으며, 유한준의 문집 '자저'에는 젊은 시절 연암과의 교유를 추억하며 그를 그리워하는 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특히 '과정록'에 나와 있는 묫자리 분쟁에 관한 기록 중 저암과 연암 두 사람이 만나 대화하는 부분과 유한준이 그의 손자 구환의 묘지를 이장하는 부분은 유한준의 문집 '자저'에 수록되어 있는 유한준 가족묘 이장에 관한 기록에 비추어 보아 시기상으로도 맞지 않고 상식적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 박지원의 유한준 비판이야말로 명대 문인의 생각을 표절한 것이었다.

 박지원이 유한준에게 보낸 편지글인 「답창애」에서 연암은 유한준의 글묶음을 보고, ‘사물의 명칭이 빌려온 것이 많고 끌어온 근거들이 들어맞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오히려 박지원의 이러한 비판이 명대 공안파 문인 원종도의 논의를 그대로 빌려 온 것이었다.
 
 유한준은 박지원과 편지를 주고받을 당시 이미 명대 문학의 조류 및 김창협 등 선배세대의 복고파 비판을 인지하고 있었고, 박윤원과의 서신 논쟁을 통해 각자의 사상·문학적 지향의 차이를 긍정하는 각도기도적 문학관을 정립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한준이 박지원에게 인정받지 못해 그의 '열하일기' 등을 비난했다는 '과정록'의 기록은 시기와 정황상 맞지 않는 박종채의 뇌피셜에 불과하다. 오히려 유한준은 「답창애」에 적힌 연암의 비판을 경청하는 동시에, 자신이 이미 정립한 각도기도론에 입각해 서로 다른 각자의 길을 긍정하는 자신의 소신대로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갔으며, 박지원에 대한 원한은 커녕, 칠순이 넘은 나이에 젊은 날을 추억하며 지향과 취향이 달랐던 벗들인 박윤원과 박지원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헌사를 남기고 있다.

 막 그 뜻을 세울 때 외람되게도 근재 박영숙과 연암 박미중이 좋은 벗이 되어주었으니, 모두가 한창 젊은 나이였다.
 영숙은 처음에는 고문에 뜻을 두어 문장이 전아하고 법도가 있었는데 중년이 되어 문장을 통해 도에 입문하여 뛰어난 유림의 표준이 되었다. 미중은 재주와 기품이 특히 높아 문장으로 스스로 경지에 올라 규범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투식에서 벗어나 조소하고 풍자하며 문장을 유희로 삼았다. 대체로 모두 고아하면서도 의기로운 사람들이다.